부처님 오신날
애 엄마가 광릉 수목원가는길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절을 작년부터 다녔습니다. 아이 대학입시때문이었지요. 자식을 위한 지극 정성의 엄마의 마음을 말없이 실천한 한 해였다고 할까요? 아무튼 대단했습니다. 대학입시가 끝난후에도 정기적으로 공부를 한다며 퇴근후, 일요일 오전에 다녀오곤 합니다. 퇴근후에는 지치기 마련이고, 일요일은 쉬고 싶을텐데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절을 다녀온 날은 아주 활기찬 모습을 보입니다. 좋답니다. 의무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서나 봅니다.
작년 100일간 보림사 스님께서 우리 아이 이름과 가족 이름을 수없이 되뇌이며 기도를 해주셨답니다.
애 엄마가 이번 부처님오신날엔 아이들을 데리고 와 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점심도 먹자고 제안을 합니다. 다른집 아이들은 한번씩 절을 방문해 인사도 했는데 우리집만 예의가 없다는겁니다. 나는 철딱서니없게 아이들이 간다면 가고...아이들 핑계를 댑니다. 아이들이 두말않고 OK를 하네요.
애엄마는 일찍 친구와 먼저 가고 우리는 점심시간에 맞춰가기로 했습니다. 큰애는 대학생이 된 후 약간의 화장과 멋을 부리기 시작해 준비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작은애는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화장과 멋부리기는 언니보다 한 수 위입니다. 큰애가 언제나 동생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으니까요. 예상시간보다 늦게 출발을 합니다.
길가 빈터에 임시 주차장을 만들어 놨더군요. 주차를 하고 앞을 보니 폐가인듯 한데 정겹게 느껴지는 풍경이 보입니다. 사람이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절하면 다 산속을 생각하는 우리네에게는 말이지요.
입구에서 바라본 대웅전 전경입니다. 절은 축석고개 너머 광릉수목원 가는 길가 바로 옆에 있더군요.
마을속으로 들어온 절은 처음 가봅니다. 작년에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구조와 색깔이 낯설기만 합니다.
마을과 아주 밀접한 절입니다.
1층 마당한켠에는 장독대가 있습니다. 장독대의 수는 그 절의 살림을 말해주겠고, 연등의 많고 적음은 신도수와 재정을 나타내겠지요. 장독대는 옛부터 어머니들이 정성으로 음식을 만드는 정표였습니다. 그 마음이 보여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점심공양을합니다. 연등도 절 주위를 겸손하게 밝히는 듯, 시골 잔칫집 같은 풍경입니다. 절이 사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애기부처를 정성스레 목욕?을 시킵니다. 옆에서 신기하게 지켜보는 아이의 모습이 부처입니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던 중, 한 중년의 남자가 나를 보더니 무척 놀라며 반가워 합니다.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사람은 나를 또렷이 기억하고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기억을 못해 얼마나 미안했던지.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20대 후반때 중학생이었더군요.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참 헤맬때였는데.... 세상은 좁습니다. 인생, 긴듯하지만 짧은것 같기도하고요. 좋은일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장인어른이 치매와 알츠하이머로 몇 년간 고생하시다 2020년 2월 초 돌아가셨습니다. 코로나가 대유행하기 직전이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 개념도 없었고 마스크 착용도 거의 안 할 때라 장인어른을 기억하는 많은 분이 찾아주셨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살아생전 수목장을 원하셨다는 얘기가 있어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서울에서는 좀 먼 곳이지만 선산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 모셨습니다.
애 엄마가 다니는 보림사에서 49재를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에게는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49재 이후 사회는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생겨납니다. 평상시에도 좀 조용했을 법한 보림사는 오는 사람이 아주 뜸해졌습니다.
장인어른의 49재 준비를 하시면서 스님께서 법당의 문창호지가 찢어진 곳이 있는데 시간이 나면 같이 수리를 해보자고 지나가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스님의 제안에 대답했던지라 나에겐 큰 숙제가 되었지요. 며칠이 지나서 애 엄마와 둘이서 법당 가운데 문창호지를 붙여 보니 해 볼만 했습니다. 아주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지 않은 곳과 너무 차이가 났지요. 어쩐다…. 한 번 다 갈아볼까? 약간의 용기가 났습니다. 스님께 법당 문창호지를 다 갈아보겠다고 하니 괜찮겠냐고.
좀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정보를 얻어 며칠 동안 작업을 하여 대웅전의 문창호지를 다 갈았습니다. 너무 환하고 깨끗해져 보는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창호지 바르는 노하우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셨을 스님께서는 일하는 동안 한마디도 참견 안 하시고 수고했다는 격려만 해 주셨지요. 그 중요한 작업을 초보자인 우리에게 뭐를 보고 믿고 맡기신 건지^^. 지금도 그때 스님의 마음 결이 나에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코로나는 그야말로 절을 더욱 적막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죽음은 여느 때와 같고. 다른 분들의 49재가 연이어 있게 되고 어찌하다 보니 49재 준비와 도우미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도분과도 알게 되었고요. 부처님오신날, 백중 회향 때도 얼굴을 보이게 되었지요. 많이 발전되었죠. 그러나 법당엔 제 발로 스스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동지 입재 날 스님께서 애 엄마한테 거사님(저)이 시간이 되면 법문 녹취를 해 밴드에 올려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라고 하시더라는 겁니다. 비대면 법회를 하게 되면서 스님은 법회를 밴드에 라이브로 올려왔지요. 사실 그전에 슬쩍 제가 스님한테 법문을 녹취해서 올려도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별말씀은 없었지요. 그리하여 동지 입재 때부터 지금까지 라이브로 올라오는 법회법문은 다 녹취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큰 인연이지 않습니까. 스님의 법문을 말입니다. 신도도 아닌 제가.
해가 바뀌어 2021년이 되어도 코로나는 여전하고. 작년보다 부처님 오신 날 법회의 규모는 더욱 작아지고. 나는 절을 다니지 않지만, 절을 방문하는 횟수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절 텃밭도 정리하고 법당 주변도 청소하고. 스님이 손이 필요하다시면 무조건 달려갔습니다. 힘도 잘 못 쓰고 일도 못 하지만 그저 손 역할을 열심히 했습니다. 평생 힘쓰는 일도 해보지 않고 긴 시간 노동도 안 해봐서 몸은 힘들었지요. 일하다가 힘들면 좀 누워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 더욱. 그래도 그런 내가 필요한 곳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좋더라구요.
결정적인 날이 왔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나에게 절을 다니라는 말 한마디 안 했는데 제가 스스로 일요 법회를 참석합니다. 2021년 6월 27일입니다.
장인어른이 저를 절로 인도하셨나 봅니다. 물론 장인어른의 따님이 있기에 가능했지만요.
티스토리 아이디와 비번을 찾은 기념으로 글을 남깁니다. (20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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