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은 타계하기 2년 전, 그를 따르던 지인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피고름 오줌을 쏟고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그는 자기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고 겸허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언장 전문을 싣는다.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1일 쓴 사람 권정생

이오덕 선생 무덤가에 권정생 ‘시비’ 놓인 까닭은…


△ <왼쪽>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오른쪽>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이오덕, 권정생 지음 / 한길사 펴냄.1만원

1970년대 초반, 마흔일곱살의 경상북도 산골 학교 교사인 이오덕(사진 왼쪽)씨가 안동에서 혼자 사는 서른다섯살 무명의 아동문학가 권정생(오른쪽)씨를 찾아갔다. 중견 아동문학가였던 이씨는 권씨의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 해맑은 작품세계에 반해 일면식도 없었지만 먼저 권씨의 집을 방문했다. 열두살 차이, 띠동갑인 두 아동문학가는 금세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이후 수백통의 편지를 수십년 동안 주고받으며 평생지기로 우정을 쌓았다. “저의 자취 경력은 이래저래 아마 이십 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저녁밥을 해 먹고 누우면 글에 대한 생각, 문우들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권 선생님의 작품집이 출판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하고 며칠 밤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이오덕, 1973년 4월30일)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년 2월8일)

'강아지똥' 읽은 이오덕 무명의 권정생 찾아가
1970년대부터 평생지기 수백통 편지글이 책으로

이씨는 세상의 번잡함을 거부하고 안동땅에 틀어박혀 홀로 어린이문학에만 몰두하는 권씨의 작품을 알려 빛을 보도록 했다. 권씨 역시 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씨와 함께 나눴고, 창작을 마치면 가장 먼저 이씨에게 글을 보내 평을 들었다.

“요즘 저는 아동문학에서 아주 철저하고 과감한 태도로 평을 쓰고 논리를 세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안일무사주의와 문단출세주의로 흐리멍텅하게 되어 있는 우리 아동문학을 일깨워 전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이오덕, 1974년 11월23일)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건넛집 살구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며칠 전 창동이네 할머니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걸 보니 할미꽃을 따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셨더군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권정생, 1985년 4월11일)

이씨는 권씨와 주고받은 편지 하나하나에 직접 제목을 달아 보관해 왔다. 5년 전, 이씨는 출판사에 편지들을 보냈다. 권씨는 사실 책을 내길 원치 않았지만, 결국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지난 8월 이씨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씨는 이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책의 서문으로 썼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이 담에 우리도 때가 되면 차례차례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씨는 임종 전에 일절 조문객을 받지 말고 부고도 장례 이후에나 알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묻힐 곳 근처에 세울 시비를 지정해 남겼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씨의 〈밭 한 뙈기〉를 넣고, 다른 하나에 자신의 시 〈새와 산〉을 넣도록 했다. 충주에 있는 이씨의 무덤가에는 지금 고인의 바람대로 두 시비가 마주보고 서 있다. 구본준 기자

한길사는 작고한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66)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묶어 최근 펴낸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를 17일부터 서점에서 급히 회수하고 있다. 권씨는 전화통화에서 “편지 속에 우리 동네 사람들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내용들이 책에 실리는 걸 그분들은 싫어한다”면서 “책을 회수해줄 것을 출판사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한길사측은 “권선생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서점에 깔린 1,200부를 거둬들이고 더 이상 찍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출간을 주도한 주중식 거창 샛별초등학교 교장은 “두 분의 얘기를 꼭 세상에 알리고 싶어 내가 출판사쪽에다 책을 내자고 제의했고 권선생님한테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사후에 보냈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2003년 11월.

나도 책이 나온다는 기사를 보고 책을 주문 신청했지만 끝내 구하질 못했다. 너무 아쉽다.

작가 권정생 “교회나 절이 없다고 세상이 더 나빠질까”

조연현 기자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 ‘교회 종지기’의 나무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뜻이라니… 천당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안동/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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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행복하소서

[가신이의 발자취] “어메 어메” 부르다 가신 고 권정생 선생 영전에


≫ 지난해 여름,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빌뱅이 언덕밑에 있는 권정생(왼쪽) 선생의 5평짜리 오두막 집을 찾은 김용락(오른쪽) 교수가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고인은 자신의 인세를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서에는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평생 무소유…인세까지 모두 기증

“어린이들로 생긴 것이니 돌려줘야

굶주린 북녘 어린이 위해 써달라”

언제까지나 저희 곁에 계실 것 같았던 권정생 선생님께서 기어이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 동시집 제목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가셨습니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을 사셨던 어머니,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와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권정생 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선생님의 바람대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오랫동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선생님이 그렇게 못 잊어 한 목생이 형도 함께 하면 더욱 좋겠지요. 전신 폐결핵이 걸려 동생 혼사에 걸림돌이 될까봐 혼사 끝날 때까지 잠시 좀 나가있으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 떠 돈지 칠십 평생, 드디어 어머니 곁으로 가시게 됐습니다.


선생님이 의지하셨던 봉화 전우익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선생님의 든든한 후원자이셨던 이오덕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의성 효선리 김영원 장로님도 그곳에 계시니까 별로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지난 4월 2일, 소변에 피가 쏟아져 나오고, 숨이 가쁘고 통증이 온다고 119 구급차 타고 대구 가톨릭병원에 입원해 열하루를 보내고 퇴원하셨지요. 제가 병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은 병상에 누워 멀리 내다보이던 두류산공원의 활짝 핀 벚꽃을 보고는 “용락아,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도시 사람 정말 불쌍타 그지? 저런걸 보고 조타카이. 우리 집에는 지금 명자꽃이 얼마나 붉게 피고 앵두꽃이 필 텐데...” 하시면서 빨리 퇴원하시고 싶어 했지요. 간병사가 선생님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기독교) 믿음 생활 하는가 보죠?”라고 묻자 곧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따금이 아니라 자주 어긋나 낭패”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줄 만큼 준다고 했는데 요즘 교회는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게 탈”이라고 말씀해 간병사 아주머니를 무안하게 만들고는 미안해 하셨지요. 사실 선생님은 자주 미국의 횡포와 미국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부시 미대통령의 폭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셨지요. 아울러 북녘 동포들의 어려움에 대해, 특히 중국 국경 주변을 떠도는 북녘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많이 안타까워 하셨지요.


17일 오전, 선생님이 또 다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해보니 산소 호흡기를 달았지만 의식이 있었고, 매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계셨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곧 일어나실 줄만 알았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선생님은 산소호흡기의 고무 호수가 꽂힌 입을 움직여 무언가 맹렬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입모양을 보고 그게 ‘어메(엄마)’ 라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매’ 소리를 2~3분간 안간힘을 쓰면서 지르시더니 더 이상 입모양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남은 우리는 선생님이 남기신 뜻이 무엇인지 새기면서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어머니 계시는 그 나라에’서 전쟁과 폭력, 가난과 소외, 질병의 고통 없는 그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김용락/경북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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