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29일) 안동에서 권정생 선생님을 뵙고 온 이후 제 가슴에 남은 짙은 여운이랄까, 따쓰함이랄까, 아픔이랄까 뭐라 뚜렷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떠나지 않고 맴돕니다. 저는 권 선생님을 뵙기 전에 몇 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로서도 꼭 뵙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뵙지도 못한 채 그 분이 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이번에 드디어 권 선생이 수십 년 지기인 이현주 목사님의 힘을 빌어서 권 선생을 만나 뵈러 간 것입니다. 제가 권 선생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인 낮 12시 보다 10여분 가량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물어 골목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님 집이 가까워오는데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 권 선생님 드시라고 홍시를 사갔는데, ‘이렇게 감이 많은데, 다른 걸 사올 걸’하고 생각했지요. 마을 끝까지 가자 권 선생님의 오두막이 나왔습니다. 권 선생님 집엔 감나무가 없다는 안도감보다도 너무도 무성한 풀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살림살이의 모습과 이젠 빈민촌에서도 보기 어려운 오두막의 모습에 가슴에서 뭔가 울컥 하고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마당가 바위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풀이 무릎 놀이까지 자란 마당엔 선생님이 불을 때 밥을 했을 솥단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문 앞엔 책과 신문 같은 것들이 지붕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방문 위엔 그가 써 붙여 놓은 듯 ‘권정생’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댓돌 위엔 권 선생님이 마르고 닳도록 오르고 내렸을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었습니다.  |
“선생님, 선생님……” 문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엔 모 신문기자가 연락 없이 이곳을 찾았는데,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전신 결핵을 앓아온 선생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을 때가 ‘쌀 두가마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몸이 무겁고 힘들지 헤아리기조차 힘듭니다. 그렇게 아프기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권 선생님이 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문을 열었지만, 권선생님이 이 목사님과 함께 나갔을 거라는 것은 상식이었지요. 다만 권 선생님 방을 꼭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방 안의 모습을 본 순간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방은 약 2평 남짓한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부엌방이기도 한 문간방엔 문 밖과 마찬가지로 온갖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만 나있었습니다. 그 안쪽이 권 선생님 거처였는데, 사방에 누렇게 채색된 책들이 쌓여 있었고, 겨우 몸을 웅크려서나 누울 수 있을 법한 공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됐을 법한 조그만 텔레비전 위엔 선생님이 드시는 듯한 약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이 전율로 다가와 저는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책 <몽실언니>와 <강아지똥> 들은 수백만명이 읽은 베스트셀러들이기에 최고로 호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과는아무런 상관 없이 교회 종지기의 삶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번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수십만부, 많게는 백만부가 팔린다는 MBC의 느낌표 선정조차 단박에 거절한 선생님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상관 없이, 천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음발이 몽실언니와 외로운 강아지똥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권선생님이었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은 누구?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 가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 밖에 안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사는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