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강아지똥 | 아름다운 이 사람 2006/11/02 18:21
한겨레 신문 조연현 기자
http://blog.hani.co.kr/joadajoa/3556


 

지난 일요일(29일) 안동에서 권정생 선생님을 뵙고 온 이후 제 가슴에 남은 짙은 여운이랄까, 따쓰함이랄까, 아픔이랄까 뭐라 뚜렷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떠나지 않고 맴돕니다.
 저는 권 선생님을 뵙기 전에 몇 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로서도 꼭 뵙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뵙지도 못한 채 그 분이 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이번에 드디어 권 선생이 수십 년 지기인 이현주 목사님의 힘을 빌어서 권 선생을 만나 뵈러 간 것입니다.
 제가 권 선생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인 낮 12시 보다 10여분 가량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물어 골목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님 집이 가까워오는데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 권 선생님 드시라고 홍시를 사갔는데, ‘이렇게 감이 많은데, 다른 걸 사올 걸’하고 생각했지요.
 마을 끝까지 가자 권 선생님의 오두막이 나왔습니다. 권 선생님 집엔 감나무가 없다는 안도감보다도 너무도 무성한 풀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살림살이의 모습과 이젠 빈민촌에서도 보기 어려운 오두막의 모습에 가슴에서 뭔가 울컥 하고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마당가 바위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풀이 무릎 놀이까지 자란 마당엔 선생님이 불을 때 밥을 했을 솥단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문 앞엔 책과 신문 같은 것들이 지붕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방문 위엔 그가 써 붙여 놓은 듯 ‘권정생’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댓돌 위엔 권 선생님이 마르고 닳도록 오르고 내렸을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문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엔 모 신문기자가 연락 없이 이곳을 찾았는데,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전신 결핵을 앓아온 선생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을 때가 ‘쌀 두가마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몸이 무겁고 힘들지 헤아리기조차 힘듭니다. 그렇게 아프기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권 선생님이 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문을 열었지만,  권선생님이 이 목사님과 함께 나갔을 거라는 것은 상식이었지요. 다만 권 선생님 방을 꼭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방 안의 모습을 본 순간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방은 약 2평 남짓한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부엌방이기도 한 문간방엔 문 밖과 마찬가지로 온갖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만 나있었습니다. 그 안쪽이 권 선생님 거처였는데, 사방에 누렇게 채색된 책들이 쌓여 있었고, 겨우 몸을 웅크려서나 누울 수 있을 법한 공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됐을 법한 조그만 텔레비전 위엔 선생님이 드시는 듯한 약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이 전율로 다가와 저는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책 <몽실언니>와 <강아지똥> 들은 수백만명이 읽은 베스트셀러들이기에 최고로 호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과는아무런 상관 없이 교회 종지기의 삶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번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수십만부, 많게는 백만부가 팔린다는 MBC의 느낌표 선정조차 단박에 거절한 선생님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상관 없이, 천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음발이 몽실언니와 외로운 강아지똥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권선생님이었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은 누구?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 가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 밖에 안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사는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

우리 곁을 떠난 몽실 언니 | 아름다운 이 사람

한겨레 신문 조연현기자

2007/05/17 17:51
http://blog.hani.co.kr/joadajoa/5441

방금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해 10월 가을 어느 날 안동에서 뵌 이후늘 제가슴 한켠을 지키고 계셨던 그 분이 떠나신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천형 같은 병을 안고 살다가신 선생님. 그 분은 바로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정(情)을 쓰다듬어 깨우고 갔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몽실언니였습니다. 아동작가로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기에 얼마든지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50년 전이나 60년 전이나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다갔습니다.

모두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다급함에 허덕이는 세상에서. 그는 한 길이나 자란 풀이 덮힌 마당을 오가며, 한평도 안되는 방에서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성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 불리는 것도 원치 않은 무소유인이자 자유인이 바로 권 선생님이셨습니다. 나가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MBC 느낌표 출연도 거부했고, 모든 상의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물론 방송이나 신문의 인터뷰에 응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홀로 그렇게 병든 몸으로 살기에 몹시도 외로웠을텐데 말입니다. 제가 왜 사람이 오는 것도 허락하지않느냐고 묻자, 선생님은 몸이 한시도 아프지 않은 적이 없이 늘 쌀 몇가마니를 지고 있는 듯이 힘이 들어서 방문객에게 웃는 모습으로 대할 수 없어서라고 했습니다.

권선생님과 함께 인근고운사를 거닐고 나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오랫동안 교회 종지기를 했지요. 그러나 오래 전부터 교회는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나저는 그 분이 진실한 기독교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그 절 벤치에서 권 선생님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권 선생님이 몸이 아프지 않고 편하게 눈을 감게 해달라고요. 그랬더니 언제나 수줍은 듯 말도 잘 하지않는 권 선생님이 '아멘!' 하더군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늘 몸이 아팠으면…….

그 쓸쓸한 집에 누워 계실 권선생님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가슴 한 켠이 아려왔습니다.

수줍음이 유난히 많았던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약자로 살며, 늘 약자를 사랑했던 몽실 언니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과 함께.

▲ 권정생 선생님.

▲ 낙엽 위의 대화

▲ 낙엽 위의 대화

▲ 권정생 선생님의 방.

▲ 권정생 선생님의 잠자리.

▲ 풀이 우거진 마당.

▲ 화장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