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눈 〈화려한 휴가〉를 봤다. 이미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니 영화 내용에 대해선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연세대와 서강대에 가까운 신촌의 영화관이었기 때문인지 관객 중엔 젊은이들이 많았다. 대다수 관객이 진지하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내 파트너는 자신이 다니는 한국어어학당에서 뭔가 테마를 하나 정해서 일반시민을 상대로 인터뷰해 보라는 숙제를 받았기에 〈화려한 휴가〉를 본 관객 24명과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영화를 보고 “좋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절반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기를 바라나?”라는 질문과 함께 주요 후보자들 이름을 열거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는 이명박, 그 다음이 박근혜씨였다. 이른바 여당계나 민주노동당 후보자에겐 기껏 한 명인가 두 명이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이런 결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제 마침내 광주5·18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 어느 지역이나 어느 세대에만 국한돼 있던 기억이 한국 시민 전체에게 공유될 때가 왔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런 긍정적인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제기될지 모르겠다.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비로소 관객들은 마치 아무 인연 없는 과거나 먼 외국의 일처럼 5·18을 오락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좋았다는 관객들이 동시에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5·18 체험이 현재의 과제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이 의문에 대한 판단은 좀더 시간이 지난 뒤 내려야 할 것이다. 〈화려한 휴가〉에 뒤이어 어떤 논의가 전개될지, 어떤 작품이 만들어질지 지켜봐야겠다.
전남대 신경호 교수를 알고 지낸 지 3년이 됐다. 신 교수는 화가다. 27년 전 이미 전남대 교수였다. 5·18 현장에 있었던 산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언젠가 신 교수와 함께 광주시내에서 차를 타고 가면서 도청 앞을 지나게 됐을 때 그는 혼잣말처럼 이런 얘기를 했다. 5·18 이전에는 이 근방에 많은 부랑자나 구두닦이 아이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시민군에 가담해 싸웠고 희생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검은 어디에 버려졌는지 지금도 찾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지인이나 친인척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그들 주검을 찾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 얘기엔 말없는 분노가 스며 있었다. 신 교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더 캐물을 순 없었다.
광주 5·18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 관객들에게 물었더니 하나같이 “좋았다”고 말하는 동시에 한나라 대선 후보자들을 지지했다. ‘화려한 휴가 ’를 두고 어떤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세대만의 기억이 시민 전체에게 공유될 때가 왔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5·18을 오락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얼마 전 오랜만에 광주에 갔을 때 〈화려한 휴가〉를 보셨나요 하고 신 교수한테 물어봤다. 5·18 현장을 아는 사람이 그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아직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광주가 계엄군에 포위당한 채 완전히 고립돼 있던 시기의 어느 날 밤, 대학에서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어둡고 좁은 골목에서 복면을 한 사람이 총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는 걸 봤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봤다. 가까이 가 보니 수척한 젊은이였다. 계엄군의 침공에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시민군의 한 사람이었다. 젊은이는 말이 적었고 금방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함평 방면의 농촌에서 왔다고 했다. 농산물이나 비료, 농기구 등을 운반하고 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는 얘기였다. 고달픈 육체노동이지만 그 노동에 걸맞게 제대로 존중받았을 리 없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젊은이가 되물었을 때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대학교수라 대답하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신 교수는 귀로에서 만난 젊은이 얘기를 아내에게 했고 자신도 도청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로 얘기했다. 그런 젊은이가 밤을 새우며 거리에 서 있다, 우리는 지붕 아래서 따뜻하게 잠자려 한다, 그래도 괜찮은가 하고. 아내는 당신에게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느냐며 걱정했다. 무리가 아니다. 장남은 아직 세 살이었다. 그날 밤 긴 이야기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확하게 듣진 못했다. 어쨌든 신 교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도청에 갔다. “주검도 봤습니다.” 그 젊은이는 어떻게 됐을까요 하고 묻자 신 교수는 “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말을 끊었다.
광주가 계엄군에 진압당한 뒤 신 교수는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사진)이라는 제목이다. 한줄기 대나무에 매어 놓은 빨간 치마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나로선 잘 모르는 얘기지만, 그것은 죽은 이의 혼과 교감하는 굿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특히 호남지방에 잘 남아 있는 전통적인 민간종교 의례다. 광주5·18 희생자들의 혼, 특히 부랑자나 구두닦이, 복면 차림의 농촌청년 등 이름 없이 죽은 이들의 혼과 교감하려는 바람이 거기에 의탁돼 있다. 하지만 나중에 이 그림은 안기부에 압수당했다. 빨간 치마는 적기를 의미한다, 이 그림은 빨갱이를 찬양하는 불온한 작품이다라는 게 안기부 주장이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압수당한 민중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하고 싶다는 바람을 신 교수는 갖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화려한 휴가〉가 크게 히트하고 있다는데, 선생님도 보시렵니까?” 하고 물었더니 신 교수는 웃는 얼굴로 “예, 봐야지요” 하고는 “지금의 붐이 지나고 조용해지면요” 하고 덧붙였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